첫화면으로

 

  코훈 박사의 서거와 불소화의 진실

  

 

 

 

 

 

 

 

 

 

 

 

  존 코훈(John Colquhoun, 1924-1999)박사는 원래 뉴질랜드의 저명한 치과 전문가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열렬한 불소화의 신봉자였다. 그러나 그는 불소화의 논리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계여행을 하고, 관련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던 중 불소화가 충치예방에 효과적이라는 것은 미신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갖가지 건강상의 장애요인이 된다는 압도적인 과학적 증거가 있음을 발견하고 경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까지 그가 몸담았던 치과계 주류의 공식적인 신념에 반하는 진실을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공개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의 하나가 1997년 시카고 대학 출판부에서 발간되는 학술지 Perspectives in Biology and Medicine 제41권 제1호에 발표된 논문나는 왜 불소화에 관해 마음을 바꾸었는가였다. (이 논문의 한국어판은 녹색평론사가 편집 . 발간한 특별자료집《수돗물불소화의 문제》(1998년)에 수록되어 있다.) 이 논문은 열렬한 불소화론자가 어떻게 불소화의 중지를 요구하는 치과전문가가 되었는지를 생생한 육성으로 말하는 감동적인 기록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불소화의 진실이 일반대중과 생태계의 건강을 볼모로 한 기업-정부-보건의료계로 연결되는 기성체제의 이익 때문에 끊임없이 왜곡, 은폐되어온 사정을 가차없이 폭로하고 있는 기념할 만한 문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치과계 내부에서의 엄격한 자기검증, 자기성찰을 통해서 나온 증언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코훈 박사는 이러한 양심적인 증언의 결과 불소화론자들로부터 가해지는 엄청난 비방, 중상모략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러한 비판 때문에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의무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양심과 도덕적 명령에 따름으로써 참으로 값진 지성적 삶의 범례를 보여준 그러한 코훈 박사가 작년(1999년) 봄 뉴질랜드의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우리는 그의 모범적인 삶을 기리고자 두 편의 외국학자가 쓴 글을 옮겨 싣는다.
 

존 코훈 박사를 추모하며 ... 브루스 스피틀 ― 국제불소연구학회,《플루오라이드》32호(1999년 8월)
존 코훈 박사의 추억 ... 무라카미 토루(村上徹) ― 일본불소연구회,《불소연구》18호(1999년 10월)

《불소화반대소식》2000년 4월 제6호


 
   

  존 코훈 박사를 추모하며

  브루스 스피틀

 브루스 스피틀 - 《플루오라이드》관리담당 편집자


  존 코훈 박사는 1999년 3월 23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자택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국제불소연구학회의 회원들은 그의 서거에 깊이 슬픔을 느낀다. 향년 75세였지만, 그의 죽음은 때 이른 감을 준다. 그는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적으로 활기찬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1984년 그의 나이 60세에 오클랜드시 수석 치과보건관리관으로서의 직책에서 은퇴한 뒤에, 그는 연구생활에 돌입하여 오클랜드대학에서 1987년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67세에 그는 국제불소연구학회의 회계책임자 및 동 학회의 계간 잡지《플루오라이드》의 편집자로서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이 잡지는 그가 편집하고 있던 8년간 번창하였다. 그리고, 그는 관리편집자로서의 일을 세상 떠나기 한달 전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일들은 그와 그의 아내에게 힘든 봉사를 요구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특유의 용기와 사심없는 태도로 보수가 주어지지 않는 이 일을 떠맡았다.

  코훈은 그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 그것을 바꾸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55년에서 1958년 사이에 오클랜드시 시의원으로서 그는 당시의 시장과 동료 의원들이 수돗물불소화에 동의하도록 설득하였다. 나중에 후회하게 될 일이었지만, 그는 불소화에 대한 반대논리를 듣고, 그것을 받아들인 의회의원 한사람에게 경멸을 퍼부었다. 몇년 뒤 그는 수석 치과보건관으로서 수돗물불소화의 결과로 아이들의 충치가 ― 특히 저소득층 지역에서 ― 어떻게 감소하였는가를 밝히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충치의 감소는 불소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수돗물불소화에 대한 그의 논리는 너무도 정연하고, 성공적이어서 수도 웰링턴의 그의 상급자들은 1980년에 그에게 불소화를 주제로 세계여행을 통한 연구를 해볼 것을 요청하였다. 세계여행 뒤 그는 불소화에 대한 보건부의 전문가가 되었다. 얼마동안 그는 식수에 불소가 첨가되는 것을 거부해온 뉴질랜드의 여러 지역에서 불소화를 추진하는 캠페인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뉴질랜드나 해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추가적인 정보는 충치가 불소화 지역만큼 비불소화 지역에서도 감소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로 인한 마음속의 의혹은 세계 전역의 불소화 주창자들의 논리에 의해서 해소되었고, 그는 당연히 뉴질랜드 국가의 '불소화 추진 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그의 직무는 공중과 동료 전문가들에게 수돗물불소화가 비불소화 지역에 비교하여 아이들의 치아에 대하여 더 양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에 착수하기 전에 그는 오클랜드의 통계를 살펴보았고, 거기서 오클랜드의 비불소화 지역에서 치과 검진을 받은 아이들이 불소화 지역에서보다 충치에 대한 치료를 덜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비숫한 결과들이 뉴질랜드의 다른 지역들, 미국, 호주, 영국, 캐나다, 스리랑카, 그리스, 말타, 스페인, 헝가리, 인도에서도 발견되었다. 코훈은 불소화 지역에서 치아가 더 양호하다고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지시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불소화로 인한 혜택을 보여준다고 알려진 연구들을 상세히 검토하였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수행된 불소화에 대한 초기 연구인 '해스팅스 불소화 실험'이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정보공개법'을 통해 공식적 문건을 확보하였고, 거기서 그 실험이 사실상 '조작'된 것임을 발견하였다. 실험지역의 학교 담당 치과의사들이 불소화로 인해 충치가 줄어들었음을 드러나게 충치를 진단하는 방법을 변경하도록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불소화가 유익하다기보다 유해하다는 견해를 말한다는 것은 인기있는 일이 아니었고, 오히려 심각한 비판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코훈에게 있어서 그러한 비판은 오리털에 묻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뉴질랜드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불소화의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가차없이 행동하였다. 1997년 호주의 브리스베인의 시장이 직접 주도한 불소화 특별위원회에 보낸 그의 의견서는 브리스베인의 수돗물불소화에 대해서 시의 대표자들이 명백히 반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존 코훈에 대해서 많은 것이 이야기될 수 있다. 그는 수많은 지역 공동체에 관련된 봉사활동을 기꺼이 맡았다. 그는 겔스턴 고등학교 이사진으로 일했고, 오클랜드 노동자협회, 뉴질랜드 평화재단, 뉴질랜드 지역교육협회, 오클랜드 대학 평생교육위원회, 뉴질랜드 노동자 교육협회에 관여했다. 그가 맡았던 직책에는 웰링턴 치과 간호사학교와 오클랜드 치과 간호사학교의 기초 및 임상과정 책임자, 뉴질랜드 소아치과학회 회장, 오클랜드대학 교육사 전공 교수, 그리고 별세 직전 오클랜드대학의 명예연구원이 포함된다.

   1984년 수석 치과보건관의 자리에서 은퇴했을 때, 코훈은 다른 사람들, 특히 사회적 소외계층의 욕구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임이 밝혀졌다. 은퇴 직후 그는 일주일에 이틀을 많은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포함된 하층민들의 교육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일에 바쳤다. 그는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스스로 옳고 정의로운 일이라고 믿는 것을 집요하게 추구하였다. 그는 그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그가 치과계를 떠날 때, 많은 간호사들은 그가 그들과 환자들에게 보여준 따뜻한 보살핌에 대하여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말하였다. 그는 임상적 판단과 기술적 처리과정에서 매우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지식과 기술 때문에 그의 은퇴는 극히 유감스러운 것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도움을 특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재능을 재조정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의 공헌이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는 국제불소연구학회의 회원들이 깊이 느끼고 있다.

  ― 국제불소연구학회,《플루오라이드》32호(1999년 8월)

 


  존 코훈 박사의 추억

  무라카미 토루

 무라카미 토루(村上徹) - 치과의사 . 의학박사


  지난 3월 23일 뉴질랜드의 존 코훈 박사가 작고하였다.

  주지하는 바, 선생은 불소연구의 세계에서 우뚝 선 존재였고, 연구와 강연을 통한 선생의 족적은 문자 그대로 세계 속에 남겨졌다. 우리나라에도 '불소연구회'의 초청으로 두차례 강연을 행하였고, 서거 수개월 전에도 병구(病軀)를 이끌고 런던과 칠레에서 강연을 행하였다. 인류적인 입장에서 불소의 위해성에 대해 계몽해온 그의 정열을 생각하면 슬픔을 억누를 수 없다.

  선생은 원래 뉴질랜드 오클랜드시의 치과보건을 주관하는 자리에 있던 분으로, 우리가 30-35년 전에 치학부의 학생이었을 때, 치과위생의 선진국으로서 자주 강의시간을 통해 들었던 이른바 뉴질랜드 방식(학동기의 초년에 치아의 가볍게 썩은 부분을 떼우는 철저한 처리에 의해서 중증 충치의 발생을 완전히 막는다는)을 위해서 학교 치과의 충실을 기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것이 발전해서 수돗물불소화에 의한 충치예방이라는 사상이 주창되었지만, 뉴질랜드에서 선생이 그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선생의 말에 의하면, 선생은 열성스러운 불소화 추진자가 되어 그 실시에 매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의 고투의 출발점이 되었다.

  뉴질랜드의 불소화가 개시되어 여러 해가 경과했을 때, 그 실적의 평가와 타국의 사정을 시찰하기 위해 선생은 세계여행에 나섰다. 전혀 예상 못한 일이었지만, 그 여행은 선생에게 고통스러운 생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 되었다. 선생은 세계 여러 곳에서 불소의 피해를 목격하고, 귀국하는 대로 자기 나라의 불소화의 영향을 조사하는 데 착수했다.

  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충치는 줄어들지 않고, 불쾌한 반점치가 유행하고 있다는 것이 목격된 것이다. 통계상 DMFT 지수에서 확실히 충치가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거기에는 충치를 검진함에 있어서 조작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선생은 간파하였다.

  경악한 선생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행정 내부에서 어떻게 하든 불소화 정책을 전환시켜보고자 노력을 거듭했지만, 일단 정치적 결정으로 출발한 사업은 개인의 노력으로 간단히 돌려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불소의 유해성을 계몽하는 연구논문도 엄중한 검열에 걸려 발표할 수 없었고, 국민에게 호소하는 방법도 닫혀 있었다. 악전고투의 상황에서 선생은 60세의 정년퇴직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은 그 때를 계기로 일체의 발언을 자유인의 입장에서 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선생은 불소에 대하여 과감하게 입장을 바꾸었다. 그 이후의 선생의 사상은 선생이 쓴 성실한 논문에 나타난 대로이지만, 그것이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에 대해서는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든지 잘 알고 있다.

  그 바로 뒤에 선생은 오클랜드 대학 교육학부에 불소화의 역사를 연구하는 논문을 제출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치학사가 의학이나 치학 연구가 아니라 말하자면 사회학적 연구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희귀한 일이다. 그의 논문〈뉴질랜드에서의 교육과 불소화 ― 역사적 연구>(1987년)는 불소논쟁을 사회학의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는 호주의 사회학자 브라이언 마틴의 말에 따르면, 이 분야에서의 필독 문헌의 하나이다.

  그러나, 선생은 책상물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행동하는 인간이었고, 언론은 그의 도구였다. 1992년 1월에 선생은 국제불소연구학회 잡지《플루오라이드》의 편집자로 취임하고, 동시에 회계담당 평의원을 겸임하였다. 세계 전역으로부터의 투고논문을 다루고, 가난한 회계 관련 잡무를 처리하는 처지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불소의 유해성을 지적함에 따라 선생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위에서 언급한 마틴의 저서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학회의 얼굴이라고 해도 될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온갖 괴로운 일이 적지 않았을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당시 선생은 고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이후 서거 직전까지 직무를 온전하게 수행하였다. 선생의 자기희생으로 가득찬 정신은 90년대의《플루오라이드》의 지면에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나는 편집자의 자리에 취임한 선생에게 조언을 한 일이 있다. 그것은 중국이나 발전도상국의 연구를 중시하여 그러한 국가로부터의 논문을 될 수 있는 한 다수 게재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서구의 연구자는 인도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지만, 중국 등에서의 불소 피해의 현황에 대해서는 모르기가 쉽다. 인도 사람들에게는 영어가 모국어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만, 어떻든 정보가 편벽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불소에 의한 피해는 지구 규모에 걸쳐 일어나는 현상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실태를 더욱 잘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 후 1994년에 베이징에서 학회가 개최되었고, 중국 학자의 연구가 이를 계기로 잡지에 실리게 된 것은 선생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한 예로, 80년대의 중엽으로부터 중국에서 빈번히 관찰된 불소에 의한 뇌기능 장애 ― IQ저하 ― 의 문제가 현재 선진국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그 큰 성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격무의 틈 사이에 선생이 세계 각국으로부터의 강연요청에 응해온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이지만, 불소화가 민주주의의 문제로도 된 호주, 캐나다, 영국에서도 자주 강연을 행하였다. 만년에는 부인을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도 대장암 수술을 세번이나 받는 등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지만, 최후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혈통 특유의 유머로 주위를 감싸면서도 다른 연구자들과 날카로운 의견교환을 계속하였던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이다.

  선생과 알고 지낸지 10년. 치과학의 선배로서, 그리고, 그 가족과도 친교의 경험을 누려왔던 나로서는 실로 아무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선생의 사상의 궤적은 절필이 된〈나는 왜 수돗물불소화에 관해 마음을 바꾸었는가〉라는 논문에 충분히 드러나 있다. 일류 학술지에 게재된 이 논문에서 선생이 밝힌 지론은 호주의 브리스베인시와 매사추세츠주 나티크시의 수돗물불소화 시비에 관한 결정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두 도시는 중립적 입장에 선 사람들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방대한 문헌조사를 행한 뒤에 불소화를 거부하였다. 또, 최근에는 캐나다의 저명한 불소연구자이며, 열성적인 불소화론자였던 토론토대학 치학부 예방치학과의 하디 라임벡 교수가 선생과 마찬가지로 입장을 바꾸어 불소화는 유해 무효라고 판정, 그 중지를 호소하고 있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어제 옳았다고 해서 반드시 오늘도 옳은 것이 아니다. 치과학이라는 좁은 부분사회에서도 다수의견에 반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고,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성실히 살려고 하는 인간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대중의 건강이 위험에 처해짐에 따라 오히려 그것을 기화로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코훈 선생의 인간으로서의 성실함은 앞으로도 우리의 행로를 비추어주는 북두칠성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 일본불소연구회,《불소연구》18호(1999년 10월)

 

 

 

수돗물불소화 반대 국민연대 사무국  office@no-fluorid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