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화면으로

 

 "수돗물불소화" 논쟁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문제들

  박경미

 

 박경미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1.

최근 열린우리당 장향숙 의원에 의해 “수돗물불소화”를 전국적으로 시행하려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이를 계기로 수돗물 불소화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일고 있다. 지금까지 “수돗물불소화” 사업과 관련한 논쟁은 의학적 효과 및 영향과 민주적 선택권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아직도 맹렬히 진행 중이다. 앞으로도 당분간 이 논쟁은 뜨겁게 계속되겠지만, 이 논쟁의 의미 내지는 방식과 관련해서 몇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대체로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의제를 둘러싼 의견대립은 막연하게나마 소위 진보와 보수라는 틀을 중심으로 전선이 형성되어왔다.(물론 최근 들어 과거 진보세력이 기성 정치세력화 하면서 이 전선이 상당히 모호해진 측면이 있지만,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라는 관념은 일종의 심리학적 정서로 여전히 엄존한다.) 그런데 이번 “수돗물불소화” 논쟁은 기존의 전선을 교란시키면서 이른바 환경운동진영 내부에서도 단체별로, 또 개인별로 견해차를 노정하고 있다. 이것을 소모적인 분열현상으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과거에는 소위 진보진영이라는 배에 동승하는 것만으로도 도덕적 정당성을 덤으로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여겨 왔으나, 이제 그 배는 떠나가 버렸고, 도덕적 정당성 역시 구체적인 논의의 방법과 행위의 타당성에 근거해서 하나하나 그림을 그려나가야만 하게 되었다. 사회운동이건, 정부정책이건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명분 하나만을 깃발처럼 내세워서 정당성과 지지자를 얻을 수 있었던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는 그 명분의 실제적 타당성을 검증받고 대중들에게 설득하는 작업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돗물불소화”에 대한 이의제기는 무의미한 트집잡기나 의도적인 제동걸기가 아니라, 그러한 실제적 타당성 확보에 대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한 진보진영 내에서의 의견대립과 세포분열은 필연적이며 동시에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돗물불소화와 관련된 과학적 논쟁의 핵심은 수돗물 불소화가 실제로 충치예방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그리고 불소를 미량이라도 장기간에 걸쳐 섭취한다면 인체에, 그리고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는 것으로 요약된다. 수돗물불소화를 추진하려는 측이나 반대하는 측이나 양편 모두 논쟁의 과학적 측면과 관련해서 매우 강경하게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당연히 이 과학적 논쟁을 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논쟁에서 전문가들의 견해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형태가 아니라, 소통을 가로막는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다.

수돗물에 저농도의 불소를 투입해서 인체에 안전하게 충치를 예방할 수 있다는 생각은 1940년대 이래 수돗물불소화를 추진하는 미국 정부와 정부측 과학자들에 의해 널리 유포되어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제 수돗물불소화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이 견해에 심각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수돗물불소화의 충치예방 효과가 불소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측에서 제시하는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며, 안전성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점을 과학적 증거와 정황증거를 들어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문가들은 이 반대 측 정보의 타당성 여부와 관련하여 대중들이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시키는 데 기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반대든 찬성이든 그러한 공론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자기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실질적 이해당사자인 대중들로 하여금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미국에서 60여 년간 시행해 왔다거나 미국의 주류 과학자들이 그 안전성을 입증해주었다는 말만을 되풀이하는 것은 사실상 토론을 가로막는 태도다. 왜냐하면 과학의 역사는 끊임없는 오류 수정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보건당국은 납첨가 개솔린, 석면, 흡연도 무해하다는 주장을 오랫동안 해온 경력이 있다. 불소라고 반드시 이 목록에서 예외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기성의 더 큰 권위에 편승해서 스스로 과학을 독점하고 있다는 듯한 태도는 토론에 임하는 ‘전문가적’ 자세가 아니다.

 

2.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류가 처한 상황은 역설적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과 기술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외부세계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과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삶의 외연 역시 개인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비약적으로 확대됨으로써 세계에 대한 개인의 통제력은 오히려 약화되었다. 삶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세계에 대한 개인의 지식은 세계의 외연이 넓어지는 속도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다. 현대인이 과거 농경사회의 농부가 자신의 삶의 세계에 대해 알았던 만큼 자신의 삶과 주변세계에 대해 이해하고 있을까? 가령 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정책적 결정이나 자신이 사용하는 문명의 이기가 어떠한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현대인은 무식하다. 아마 갈수록 더 무식하고 무능해질 것이다.

현대인은 자신들의 일상적 무능함을 전문가들에 의존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삶의 모든 영역을 잘게 부수어 전문가들에게 한 조각씩 맡기고, 전문가들은 다시 그것을 가루로 만들어 최초의 형체를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최종적 결과물로부터 최초의 실물을 상상해낸다는 것은 개인으로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문가들의 전문가적 지식과 거기에 근거한 기업이나 관료들의 정책적 판단 사이에 개인이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는 대신, 그 부분이 온갖 종류의 이해관계와 오류로 인해 왜곡될 가능성은 많다. 이러한 위험성을 예방하고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이들의 인적, 물적 동원력이라는 것은 기업이나 정부와는 비교할 수 없다.

실제로 미국의 수돗물 불소화의 역사를 보면 불소를 산업폐기물로 방출하여 이로 인한 지역주민들의 항의와 저항에 직면한 유수의 알루미늄 생산회사나 화학회사들이(Alcoa, U.S. Steel, Reynolds Metals, Dupont 등) 수돗물불소화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정부 측 연구들의 돈을 대고 지속적으로 그 연구를 장려해왔다는 기록과 보고들이 있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크리스토퍼 브라이슨은 『불소: 거대한 속임수』라는 책에서 불소화의 안전성을 입증하고자 한 과학자들이 기초적인 데이터들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데서 자신들의 연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기업이나 정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사실을 소상하게 밝혀준다. 그리고 사실상 과학연구의 객관성이라는 것도 수돗물불소화의 안전성에 대한 신화만큼이나 유지되기 어려운 신화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더욱 심각한 문제점은 오늘날 과학연구에는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투입되는 반면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의 맥락으로 설정하는 범위는 협소하다는 점이다. 천문학적 규모의 자본이 과학연구에 투입됨으로 인해 과학연구가 미치는 영향력의 범위는 전방위적으로 확대된 반면,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연구의 실질적 효과나 영향력을 연구의 맥락 안에 계산해 넣지 않는다. 설사 계산에 넣는다 해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더하기만 할 줄 알지 빼기는 할 줄 모른다. 자신들이 하는 연구가 사회에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와 편리함, 속도만을 계산하지 그것이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들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현재 사실상 그 해결책이 없는 핵폐기물의 문제는 만일 과학자들이 원자력의 효용가치만이 아니라 그 위험성까지도 심각하게 고려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문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생명복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과학자들은 난치병 퇴치라는 한 가지 효과만을 이야기하지, 난마와 같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간 삶과 생태계에 그것이 끼칠 영향과 그로 인해 생겨날 수많은 상황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로 인한 파괴적인 결과는 보통 사람들, 특히 사회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결정적으로는 후세대의 몫으로 돌아온다. 특히 한정된 석유에너지에 기반하고 있는 거대한 현대 산업문명은 더 이상 석유에너지가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한 어떠한 근본적인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확대일로를 걷고 있다. 최근 전국민적 인기와 함께 유망한 미래산업으로 힘을 얻고 있는 생명공학 역시 전지구적 생명의 그물망을 생각할 줄 모르고, 그것이 가져올 어두운 미래에 대해 아무런 고려가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적이다. 그러한 것들은 외견상 제아무리 밝고 건설적인 구호를 외치더라도 미래에 대한 아무런 전망도, 대책도 없다는 점에서 그 뿌리에서부터 허무주의적이고, 미래 지구의 생명공동체를 볼모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부도덕하다. 그러므로 현대 산업문명의 이득만을 챙기려 하는 한, 우리는 미래 후손들의 삶을 빼앗아 살고 있는 것이며, 이 점에서 근본적으로 우리는 허무주의적이며, 부도덕하다.

수돗물불소화 사업의 경우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수돗물불소화로 인한 충치예방 효과만을 반복해서 입증하고자 할 뿐, 그것이 인간 삶과 광범위한 생태계에 미칠 수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들을 자신의 연구의 맥락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질 수도 없다. 수돗물불소화의 경우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그로 인한 파괴적인 영향은 수돗물을 늘 먹어야 하는 사회경제적 빈곤계층과 자연환경에 일차적으로 나타날 테지만, 그 미래의 결과에 대해 책임질 사람은 없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전문가들을 믿어서가 아니라 별 도리가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의존한다. 사실상 전문가들은 그리 믿을만한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협소한 전공영역만을 자기 연구의 맥락으로 상정할 뿐 시공간적으로 그것을 넘어서는 것들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도 없고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이 하는 일이 가져올 수많은 상황과 경우들을 상상해낸다는 것은 애당초 인간적 능력을 넘어설 것이다. 이럴 때 전문가들에게, 인간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덕목은 ‘겸손함’이다. 자신이 속한 지역과 공동체의 사람들과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들 하나하나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 배려가 그 ‘겸손함’의 실질적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수돗물불소화”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것이고, 안전성 문제는 우리에게 맡기라는 식의 태도에는 모든 것을 추상적으로 범주화해서 죽은 사물로 인식하는 자의 지적 ‘오만함’이 묻어난다. 사회적 약자는 막연한 범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장애인으로, 때로는 불소에 취약한 특이체질의 사람으로, 때로는 영유아로, 온갖 종류의 구체적인 개인들로 존재한다. 이 수많은 개인들에 대한 배려 없이 추진되는 사회복지 정책, 건강보건 사업은 공허할 뿐만 아니라 파괴적이다. 그리고 칸트를 전공한다 해서 칸트가 자기 것이 될 수 없듯이, 과학도 과학자의 것이 될 수 없다.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의 영향을 일차적으로 받게 될 사람들의 살아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그들에게 요구되는 ‘겸손함’의 미덕을 실천하는 길이고, 사실상 과학은 그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과학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수돗물불소화” 문제뿐만이 아니라 우리 몸과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모든 문제들과 관련해서 우리가 집요하게 놓지 말아야 할 것은 피해를 당할 수 있는 생명 그 자체의 자리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생명윤리의 기본이다. 피해당하고 고통 받을 수 있는 생명의 자리에 내가 가서 그 생명을 위해 판단해야 한다. 그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이차적이거나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수돗물불소화가 다수에게 유익한지도 의문이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다수의 이득과 편리함을 위해 소수가 당할 수 있는 고통은 무시해도 좋다는 논리는 반생명적이다. 왜냐하면 삶이란 추상적 다수의 삶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고 상처받을 수 있는 수많은 개체 생명들의 삶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문제는 남이 대신 결정해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고 사는 문제기 때문이다. 죽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남이 결정해줄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예외적으로 남이 결정해줄 때는 직접 그 당사자인 생명의 자리에 가서 직접 느끼고 판단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수돗물불소화와 관련해서도 수돗물을 직접 마시는 사람들의 입장과 수돗물불소화를 통해 망가질 수도 있는 자연환경의 자리에서 느끼고 판단해야 한다. 과학적 정보에 대한 정책적 판단이나 삶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판단은 수돗물을 먹고 마시는 주체들이 직접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판단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수돗물불소화 문제와 관련해서 불소화를 추진하려는 사람들이 정말로 구체적인 생명의 자리에 가서 느끼고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만일 정말로 그들이 구체적인 생명의 자리에서 열린 자세로 이 문제를 대했다면, 불소화의 유해성을 입증하는 연구들이 계속 나오는데도 그것을 그렇게 간단히 무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실질적인 불소섭취량을 조사하지도 않은 채 미국의 기준을 따라 일방적으로, 일괄적으로 0.8ppm의 불소는 안전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진실하게 누군가를 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스스로 알고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민중의 권리를 빼앗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소수돗물은 대다수 가난한 민중들이 먹을 것인데, 그 민중들이 소상한 과학적 정보를 알고도 그것을 원할 것인가를 전문가들은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 전문가들인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과학적 정보와 판단을 독점해서는 안 되고, 그들이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전문가들이, 과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는 누군가 자신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고 하면 그저 감지덕지 받아들이는 ‘죽은 사물’이 아니다. 수돗물에 불소를 넣어 충치를 예방해준다고 하면 그들이 좋아하리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약자를 하류인생으로 대하는 오만한 태도다. 그들에게도 알고, 판단하고, “No”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들에게 이 권리를 돌려주어야 한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정책이나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좋고 싫음을 느낄 줄 아는 살아 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돗물불소화에 대한 판단은 무엇보다도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수돗물에 뭔가 이물질을 넣는다고 할 때 가지게 되는 꺼림칙한 느낌을 존중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연 상태의 물에 뭔가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꺼림칙하다. 하물며 독극물인 불소를 넣는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꺼림칙하다. 이것은 복잡한 과학을 이야기하기 전에 누구나 보편적으로 갖게 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것은 과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이 대중을 가르치려 하기 전에 먼저 경청하고 존중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돗물불소화를 추진하는 정부 보건당국과 일부 치과계 인사들의 태도는 생각은 전문가들인 과학자들이 대신 해주고, 판단은 정책입안자들이 대신 해줄 테니 무조건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No thank you”라고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고 그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하물며 수돗물불소화의 유해성이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No”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의 권리는 더더욱 존중되어야 한다. 이러한 권리를 무시하고 시행되는 수돗물불소화 사업은 전체주의적인 강제의료 행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체에 유해가능성이 있고 반민주적인 “수돗물불소화 사업”은 중단되어야 하고, 최근 장향숙 의원에 의해 발의된 구강보건법 개정안 역시 철회되어야 한다.

 

 

 

수돗물불소화 반대 국민연대 사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