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화면으로

 

  불소화 - 침묵의 벽을 깨다  (2/4)

  마크 디젠도프

 

 

 

 

 

 

 

 

 

 

 


1, 2, 3, 4

  논쟁이 언론의 주목을 끌다

  1979년 불소화와 암의 상관관계를 주장한 논문의 주(主) 필자인 미국의 생화학자 존 야무야니스 박사(23)의 호주 방문은 이 논란거리 이슈가 보다 상세히 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주류 의학 및 치과계는 언론매체에서 야무야니스를 개인적으로 공격하였으나 그가 제시한 과학적 증거를 토론할 의지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SSRS를 움직여서, 호주국립대학이 야무야니스와 NH&MRC의 대변인 사이의 과학적 논쟁을 벌이게 만들었다. NH&MRC는 처음에는 이 주제가 과학적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전통적인 친불소화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내가 《캔버라 타임스》로 하여금 이 이슈에 관심을 갖게 만들자 NH&MRC는 공개적으로 누군가룰 내세우든지 아니면 주장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들은 마지못해서 퇴직한 약학교수 롤랜드 소프를 발표자로 내세웠다.

  논쟁은 벌어졌고, 소프가 불소화와 암의 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것이 금새 분명해졌다. 그는 그저 정형화된 불소화 찬성연설을 할 뿐이었다. 그는 불소화와 암에 대한 야무야니스의 구체적인 논점들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또 NH&MRC를 위해 누가 불소화와 암에 관한 과학문헌을 평가해왔는지 밝히지 못하거나 밝히길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야무야니스가 틀렸다고 선언했다. 이 논쟁은 《캔버라 타임스》에 공정하게 보도되었고, 뒤이어 몇몇 흥미로운 독자편지가 게재되었다.

  여기서 나는 SSRS나 내가 한번도 불소화가 암을 유발한다는 입장을 취한 적이 없었음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상충하는 증거가 있지만, 추가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할 만큼 우려할 만한 근거는 충분하고, 따라서 SSRS가 이 문제에 대한 공개적 토론을 열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로 보였다.(24)

  의학 및 치과계의 반응은 내가 풍력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해외로 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25) 그들은 내가 없는 사이 나의 동료 SSRS위원들과 접촉하여 SSRS가 이 이슈를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또한 불소화 지지자들은 '호주통계학회'와 함께 불소화에 관한 공동토론회를 열었는데, 오직 찬성론자들만 발표하는 자리였다. 친불소화론자들은 불소-암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통계학자들의 지지를 분명히 필요로 했다. 이 문제와 기타 다른 문제들에서 나에 대한 SSRS의 지지가 부족한데 실망하여, 나는 사무국장직을 사임하고 나의 에너지를 다른 공동체 그룹으로 돌렸다.

 


  상자글 1. 불소화의 권력구조 - 역사와 전술

  호주의 대표적인 불소화 지지 연구기관들로는 1952년에 최초로 불소화를 승인한 국립보건및의학연구회(NH&MRC), 호주치과의사협회(ADA), 호주의사협회(AMA) 그리고 주(州)보건국들이 있다. 몇년 전까지 연방보건부(Federal Department of Health)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보건부내 치과보건과가 비용절감의 일환으로 폐쇄돼버렸다. 브라이언 마틴의 책(26)은 호주 불소화 논쟁의 몇몇 주요인물들을 열거하고 그들의 견해를 조사해 놓았다.

  위의 친불소화 단체 속에는 불소화에 대한 과학, 의학, 치과관련 오리지널 문헌을 읽은 사람이 거의 없는 듯하다. 또 공청회장이나 대학 강단에 서서 그 문헌들을 읽어본 불소화 반대자와 정직하게 이 이슈에 대해 토론할 만한 사람도 거의 없다. 불소화에 대한 그들의 지지 근거라는 것이 치과 및 의과 학부에서의 피상적인 학습, 의사 및 치과의사 협회 집행위원회의 불소화 보증, 그리고 소수의 핵심요원들이 정책결정자와 대중들에게 꾸며낸 친불소화 프로파갠더이다. 이는 불소화가 장려되고 추진되어 온 방식--로비를 통해 몇몇 핵심 공공기관 고위층의 지원을 획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풀뿌리 운동이 되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대중들은 불소화에 대해 의사표시를 할 기회--주민투표, 공청회, 신문의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와 청원--가 주어질 때 대다수가 이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일찍이 1943년에 불소는 공기 및 수질 오염물질로 공식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미국 공중보건원(USPHS)은 1ppm을 초과하는 불소농도는 수돗물을 거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 제련과정에서 사용된 불소의 처분에 비용이 많이 드는 알루미늄 산업이 지원한 한 연구가 치아형성에 불소가 반드시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후 일단의 치과의사들과 위스콘신의 치과보건 공무원들이 끈질긴 로비활동을 벌인다. 결국 1950년에 USPHS가 기존의 조심스러운 입장을 뒤엎고 불소화를 승인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호주의 NH&MRC처럼 USPHS도 연구비지원을 통하여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USPHS와 NH&MRC의 집행위원회 그리고 의사협회 및 치과의사 협회의 불소화 지지를 시작으로 많은 다른 기관·단체들이 그 방향으로 흘러갔다.(27) 비록 많은 의사들과 적지 않은 치과의사들이 당시 불소화 반대를 부르짖었지만(28), 그들은 조직화되지 못했고, 그들의 반대 목소리는 공식적 지지의 파고(波高)에 잠기고 말았다.

  불소화가 미국에서 확산되면서, 저명한 알레르기 전문가 조지 월드보트 박사는 그의 환자들 중 일부가 불소화된 물을 마시고 알레르기, 부적응, 혹은 과민반응으로 고통받았다고 발표했다. 그의 책에는 불소화 추진자들이 그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의학 및 과학 저널들, 그리고 언론매체들이 그의 보고서를 다루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용한 비열한 수단들이 폭로되어 있다.(29) 실제로, 미국에 근거를 둔 의학 저널들이 더이상 불소화의 건강상 위험에 대한 논문들을 게재하지 않게 되자, 월드보트는 자신의 논문 한편을《호주의학지 Medical Journal of Australia》에 싣는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30) 뒤이어 침묵의 장막은 호주에도 드리워졌다. 이와 유사한 지적 억압이 1980년대에 나를 향해서 겨냥되었을 때, 월드보트의 1965년 책은 내가 이에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불소화 지지자들은 의학, 치과, 공중보건기관의 권위를 이용하여 불소화 반대의 과학적 증거를 거의 모든 영향력 있는 매체로부터 단절시켜 버렸다(31). 불소화 체제는 신문, 잡지, 서적의 편집자들과 출판업자들, 그리고 전파매체의 프로그램 개발자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1979년 뜻밖에도 호주 ABC방송이 〈4 코너〉라는 TV프로그램에서 불소화를 둘러싼 양편의 주장을 내보낸 후, 원로 치과 및 의사들은 ABC에 영향력을 행사해 그 후 여러 해 동안 이 주제를 다루지 못하게 만들었다.(32) 멜버른의 한 유력 일간지 《시대》의 한 저널리스트는 불소화 문제에서 손떼지 않으면 해고를 각오하라는 위협을 받았다고 나에게 말했다.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서 발간되는 교외 신문 《해변뉴스》의 편집자 크리스 휠러는 1988년 많은 독자들로부터 온 불소화 찬반 편지들을 게재한 호(號)가 나간 그 날로 해고되었다.

  미국에서는, 국교 반대자들에 의해 형성, 정착되어온 역사와 풀뿌리 민주주의의 전통 때문에  지역공동체들이 정책결정에서 더 큰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불소화된 수돗물을 마시는 인구비율을 50퍼센트 가까이 낮추는 데 이바지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형수(流刑囚)들의 정착지를 근거로 한 식민정부로부터 계승된 권위주의적 형태의 주정부들을 가진 호주에서는 불소화를 위한 법제화가 현저하게 반민주적이다. 예를 들어,

  • 뉴사우스 웨일즈주(州)의 1989년 수돗물불소화(수정)법안은 지방정부들이 불소화를 중단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 1973년 빅토리아 보건(불소화)법령은, 자신들을 선출한 공동체 주민들의 의지에 따라 주정부의 불소화 요구를 거부할 경우, 주정부가 해당 상수도 관리당국에 무거운 벌금을 과하는 것을 허용한다.
  • 타스마니아주의 1968년 불소화법 제13조는 지방정부들이 불소화에 대한 여론조사를 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33)



  ANZAAS 심포지움이 매체의 주목을 끌다

  1980년대 초에는 불소화의 건강상 위험에 관한 공개적 토론이 주류 매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 그러나, 공적 모임에서의 연설, 지역 라디오방송 출연, 지역신문에 보내는 편지 등을 통해 나는 여러 지역공동체가 불소화를 강요하려는 뉴사우스 웨일즈 정부의 시도를 배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풍력연구와 내가 1980년에 공동설립자로 있었던 남양주풍력협회(Australasian Wind Energy Association)의 강화에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틈틈이 불소화에 관한 치과문헌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불소화에 대한 나의 연구는, 1960-70년대에 '불소화를 하지 않은' 여러 선진국들에서 충치가 크게 감소했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외국 논문들의 출판으로 다시 활력을 찾았다.(34) 호주에도 유사한 충치감소의 증거가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는데, 이것은 불소화 이전의 시드니와 비불소화 지역인 브리스베인(35)에서 관찰된 것이다. 이 지역에서 충치감소는 불소치약에 의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일찍 시작되었고, 불소정제가 주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도 있었다. 이에 대해 치의학 연구자들과 불소화 추진자들이 회피하는 당연한 질문 하나가 있다. 불소화 지역과 비불소화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정도로 충치가 크게 감소했다면 그것은 동일한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 공통된 요인이 불소화라고는 할 수 없었다.

  호주의 불소화 추진자들은 그들의 공식 보고서(36)에서 이 새로운 과학적 증거에 대해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새로운 자료가 호주 과학자들에게, 그리고 어쩌면 언론매체에도 흥미로운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필립 서튼 박사의 협조를 구하여, 우리는 함께 '호주/뉴질랜드 과학발전협회(ANZAAS)'가 후원한 '1985 과학축제'에서 불소화 심포지움을 주최하였다. 우리는 바로 그 즈음 불소화에 관해 통찰력있는 정치학 논문을 썼던 웬디 바니(37)를 발표자로 초빙하고, 심포지움을 더욱 활기있게, '균형'있게 만들기 위해서 친불소화 그룹인 호주치과의사협회( ADA)와 NH&MRC에도 각각 발표자를 보내도록 요청했다.

  ADA는 즉각 (우리가 아니라) ANZAAS 과학축제 조직자들에게 회답을 보내어 불참을 통보하고, 우리의 동기에 대해 의심을 표명했다. 몇몇 ANZAAS 조직자들은 이 편지를 심포지움을 중단시키기 위한 노골적인 시도라고 해석했다. NH&MRC는 심포지움 시작 2주 전에야 회답을 보내 그 때는 이미 수용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그 조건하에서만 참여하겠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의 회답으로 심포지움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우리가 이 상황을 언론매체에 설명했을 때 그들은 이것이 '뉴스거리'라고 판단했고, 심포지움의 사전홍보를 아주 훌륭하게 해주었다. 그 결과 언론매체들과 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많은 과학자들을 포함하여 거의 백명이 참석하였다. 호주에서는 처음으로, 불소화의 혜택이란 것이 매우 과장되어왔으며, 불소화된 물이 정말로 건강을 해칠 수 있고, 불소화 추진운동과 불소제품들이 알루미늄 산업과 설탕식품 산업 같은 기득권자들로부터 부분적으로 재정지원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언론매체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뒤이은 언론보도 과정에서 불소화 제창자들은 공개적인 토론의 마당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과학적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이슈를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데 익숙치 않은 그들은 필립 서튼, 웬디 바니, 그리고 내가 제기한 질문의 대부분에 대해 의미있는 답변을 하지 못했다. 대신 우리를 개인적으로 비방하려고 하였다. 이 심포지움에 참여하고, 언론에 보도될 때 나는 CSIRO과학자라고 소개되었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나는 나의 결론이 반드시 내가 관계하고 있는 단체의 결론과 동일한 것은 아님을 분명히 했다.

  불소화 제창자들의 진짜 반격은 무대 뒤에서 진행되었다. ADA는 CSIRO의 대표와 이를 관할하는 과학기술부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나의 '활동'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면서, 그것을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속임수나 다름없는" 짓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내가 CSIRO과학자로 행세하였다고 공격했다.(38) 다행스럽게도, CSIRO의 의장과 장관 모두 이 고압적 전술에 동요하지 않았다. CSIRO의 한 행정관이 ADA의 이러한 항의내용을 내게 알려주었고, 나는 그 후 정보공개법에 따라 그 편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과학기술부장관 배리 존스는 ADA로부터 받은 한 편지에 다음과 같은 주(註)를 달아 놓았다. "그들이 그의[디젠도프] 주장에 반대해야겠다는 마음이 집단적으로 일어났다는 게 가능할까?......아마도 과학적 논쟁이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못한 듯하다."

  치과의사들과 의사들은 이런 종류의 압력에 나보다 더 취약하다. 불소화에 대해 우려하는 치과의사, 과학자 그리고 의사들에 가해지는 탄압의 여러 사례들은 월드보트(39), 물렌버그(40), 마틴(41)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상자글 2. 불소는 치아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불소화 초기인 1950-60년대에 치학 연구자들은 불소가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서는 직접 섭취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이론은, 불소는 전신적으로(즉, 내복을 통해) 작용하며, 혈류로부터 치아에나멜로 이동, 치아를 강화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측정결과 불소는 결코 혈류에서 타액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섭취된 불소의 약 절반은 일생 동안 뼈에 축적되며 나머지는 (정상기능이라면) 신장에 의해 오줌으로 배출된다. 게다가, 전신(全身) 작용 이론은 1970년대 후반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불소치약이나 겔의 활동, 즉 치아표면에 작용하는 불소의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렇게 되자 치과의사들은 전신 작용과 치아표면 작용의 혼합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연구자들은, 전신작용 이론과는 반대로, 각 개인에게 발생하는 충치의 양은 치아에나멜 속의 불소의 양에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불소화 지역과 비불소화 지역간에 치아에나멜 속에서 관찰되는 불소수준의 차이는 너무 미미해서 충치율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더욱이, 여러 차례의 쥐 실험을 통해서 불소가 치아를 거치지 않고 혈류 안으로 서서히 들어갈 때는 충치감소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고농도의 불소가 구강내에서 방출될 때 충치감소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 밝혀졌다.(42)

  현재 불소를 삼키는 것으로는 거의 혹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과학적 증거가 있다. 불소는 치아표면과의 접촉을 통해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43) 덴마크의 올레 페예르스코프 교수 같은 일부 주류측 전문가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여타 전문가들은 아마도 이 사실을 인정하면 수돗물불소화의 논리가 타격을 받을 것임을 내다보면서, 여전히  과학적 증거를 무시하고, 전신적 작용과 접촉 작용이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네이처》에 실린 논문

  ANZAAS 심포지움이 성공함에 따라, 나는 불소화가 막대한 혜택이 있다는 주장에 관해서 국제적인 과학 토론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비불소화 지역에서 충치가 감소해온 것을 보여주는 자료를 모두 수집해서, 치과의사가 아닌 과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요약하고, 거기에 '호주학교치아보건국'에서 나온 새로운 데이타를 추가한 다음, 비불소화 지역의 충치감소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당연히 해야 할 질문'을 제기하여 몇 가지 타당한 답변을 제시하고, 마지막으로 눈에 띄는 제목을 붙여 세계적인 과학잡지라고 하는《네이처》지에 기고했다.

  몇달 후 《네이처》 편집자가 상투적인 친불소화 노선을 따르고 있는 논문 심사위원의 보고서를 내게 보내왔다. 나는 편집자에게 이미 원래의 원고에서 내가 그 심사위원이 제기하고 있는 논점의 대부분에 대해 답변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몇가지 논점을 설명하기 위해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나는 다시 그 논문을 보냈다. 마침내 <충치감소의 신비(The Mystery of Declining Tooth Decay)>가 1986년 7월에 발표되었다.(44) <네이처>의 편집자가 나를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신뢰한 것은 그에 앞서 16년 동안 내가 천체물리학, 우주물리학 및 풍력과 같은 '자연과학'적 주제에 관한 여러 편의 연구논문을 심사를 거쳐 그 잡지에 이미 발표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네이처》에 발표된 논문은 세계 전역의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이것은 불소화 반대운동의 한 획기적인 돌파구가 되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미국의 앨버트 버그스탤러, 뉴질랜드의 존 코훈을 포함하여 불소화에 의문을 제기해온 해외의 과학자, 치과의사, 의사들과의 유대도 강화되었다.

  불소화 체제측의 반격은 내 논문을 왜곡한 은밀한 비평을 돌리고, 내 논문이 심사를 거치지 않은 것이라고 거짓말을 퍼뜨리고(45), 내가 다시는《네이처》지에 불소화에 관한 글을 발표하지 못하도록 편집자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 편집자에 대한 압력에 관해서는 몇해 뒤 미국에서 누군가가 내게 한통의 편지 사본과 거기에 첨부된, 나의《네이처》지 논문에 대한 미간행 비평을 보내주었을 때 알게 되었다. 이것들은  1980년대에 호주의 가장 열렬한 친불소화 운동가의 일원이었던 그레이엄 크레이그 박사가 <네이처> 편집자 앞으로 보낸 것이었다. 공개토론을 장려하는 정상적인 과학의 관행과는 반대로, 그 편지(1986년 8월 15일자)의 서두는 이러했다. "이 서한(書翰)과 동봉한 문건은 귀지의 '독자 논평'란(欄)을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내가 그전에 이 자료들을 본 적은 없었지만, 내게까지 도달된 방식으로 보아 그것들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널리 돌려져왔음이 분명했다. 크레이그의 비평은 너무도 쉽게 반박할 수 있는 내용이었고, 따라서 그것이 공개적인 발표를 위해 제출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또 누군가는 당시 호주 연방보건부의 치과보건국장이었던 로이드 카 박사가 세계보건기구(WHO)의 구강보건책임자 데이비드 밤스 박사에게 보낸 1986년 9월 18일자 편지의 사본을 내게 보내주었다. 카의 편지는 "디젠도프의 《네이처》 논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호주의 데이타를 설명하고 반박해주기 바랍니다"라는 요청에 대한 응답임이 분명했다.(46) 나의 《네이처》 논문이 국제 불소화 체제를 당혹하게 만들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호주보건연구소의 반불소화 운동

  1988년에 나는 호주정부의 보건통계 연구소인 호주보건연구소(Australian Institute of Health)의  선임 연구원에 임명되었다. 이 직위는 내게 학계와 공중보건 분야에서 불소화에 대하여 추가적인  토론을 이끌어낼 기회를 주었다. AIH에서의 나의 주요 업무는 호주 의료서비스의 이용과 비용을 분석하는 일이었다. 채용인터뷰 도중 이 연구소가 내게 불소화에 대한 연구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호주국립대학 객원교수로서의 연구기간을 막 마친 상태였는데, 다행히도 그 기간 중 호주 및 해외에서 발표된 잘 알려진 연구논문 몇 편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었다. 이 연구들은 불소화의 엄청난 치과적 혜택을 증명할 목적으로 수행된 것이었다.(47) 나는 이 '고전적' 연구들이 너무나 빈약하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거의 무가치한 것들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AIH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내가 비공식적으로 해야 할 첫째 과제는 불소화에 관한 추가적인 연구를 수행하기보다 내가 발견한 이 조사결과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두 차례의 불소화 세미나를 개최했다. 의학과 치과 기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반응이 좋았다. 불소화 지지자들은 반불소화측 발표자들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는데, 내가 이 세미나에 AIH의 선임연구원 자격으로 참가한 것을 보고 속이 쓰렸을 것이 틀림없다. 두번째 세미나가 끝나자마자 AIH의 소장은 내게 앞으로 불소화에 대해서 침묵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나는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1988년에 나는 브라질에서 열린 불소화에 대한 국제 심포지움 및 토론회에 초청 받아, 찬반 양측의 몇몇 과학자 또는 전문가들과 함께 참가했다. 청중은 상수도 및 환경기술자들, 치과의사, 의사, 그리고 공중보건 관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몇몇 세계의 주도적인 친불소화론자들에 맞서서 내 논리를 검증할 수 있었고, 존 코훈 박사나 존 리 박사와 같은 최고의 반불소화론자들과 같은 팀에서 활동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나에게 값진 경험이었다. 한편, 미국의 친불소화 치과의사 허쉘 호로위츠는 프로답게 준비한 슬라이드로 극적인 방식으로 발표를 하였다. 하지만 발표내용은 빈약한 것이었다. 우리는 비록 손으로 그린 슬라이드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논리와 확신은 청중에게 잘 전달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심포지움의 결과 브라질에서는 불소화의 확대가 계획되었다가 취소되었기 때문이다.(48)

  1989년에는 AIH에서 잠시 휴가를 얻어 나는 영국 셰필드대학, 영국 캠브리지의 던(Dunn) 영양실험실, 런던의 성토마스 종합병원, 뉴욕주보건국 조사과, 워싱턴 DC에 있는 미환경청, 캘리포니아의 스탠포드대학 등에서 불소화에 관해 강연을 하면서 세계를 순회하였다. 이 순회강연은 몇몇 저명한 기관들에서 침묵의 벽을 깨뜨리는 데 기여하였고, 또한 이들 '어려운' 국가에서 불소화 반대입장이 제한적으로나마 언론매체에서 보도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캔버라로 돌아와, 나는 한 지방정부의 불소화 관계 조사를 위해 증거를 제시하였다. 조사위원회의 입장은 양분되었고, 결국 또다른 증인인 '국립역학 및 보건센터'의 소장 봅 더글러스 교수가 제시한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위원회는 캔버라 수돗물의 불소농도를 절반으로 줄이도록 권장했고 결국 실행되었다. 하지만 호주치과의사협회와 의사협회는 지방정부와 야당에 로비를 벌였고, 그 결과 정권교체 후 1992년 초, 끝내 불소농도는 1ppm으로 되돌아갔다.

  나중에, 호주치과의사협회(ADA)가 사용했던 로비문건 중 일부가 《ADA 소식지》에 익명의 기사로 실렸다. 기사는 나와 코훈 박사의 연구를 왜곡하고 일련의 거짓말을 늘어놓았는데, 그 수준은 너무나 야비해서 법률자문에 따르면 명예훼손 감이었다.(49) 그걸 빌미로 코훈 박사와 나는 그 기사의 왜곡을 폭로하는 우리의 반론을 《ADA 소식지》에 싣게 할 수 있었다.(50) 하지만 그렇다고 캔버라 수돗물의 불소수준이 좀더 안전한 0.5ppm으로 되돌아간 건 아니었다.
 

  NH&MRC의 조사

  1989년 코훈, 써턴, 디젠도프가 공동명의로 보낸 편지에 대한 응답으로 NH&MRC는 불소화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일부 불소화 추진자들이 과학적 데이타를 왜곡, 오용해왔다는 우리의 주장에 대해서 조사하기 위해 새로운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51) 1991년 최종 보고서(51)가 발표되었는데, 겉보기에 이것은 불소화와 주도적 불소화론자들을 옹호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보고서의 '요약'에는 아래와 같은 오도적인 문구가 들어있다.

조사위원회는 호주 내에서 골격불소증이 발생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불소화된 물(1ppm)과 불소가 함유된 기타 물질에 노출되어 있는 지역공동체에서 불소가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건강상 부작용의 증거는 없다. (강조 - 필자)

  밑줄 친 문구는 골격불소증에 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는 해외의 자료를 배제하고 있다. 그러면서 보고서의 본문에서는 골격불소증에 대한 우려를 조심스럽게 인정하고 있다. 보고서의 '요약본'밖에 읽을 수 없는 대다수 독자들은 이를 알지 못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혹은 천연적으로 불소가 들어있는 물이 원인이 되는 건강상 부작용의 증거는 없다고 그릇된 가정을 하게 된다. 보고서의 편향된 성격은, 코훈, 써턴, 그리고 나 자신이 발표한 불소화 관련 학술논문들을 그 폭넓은 참고문헌 목록에 하나도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53)

  하지만 조사위원회는 분명 우리가 제시한 증거가 신경이 쓰였고, 자신들을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꼈다. 그러다 보니 보고서 본문의 깨알글씨 속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조심스럽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 식수에서의 불소농도가 0.7ppm인 외국의 일부 지역에서 몇몇 '고립된' 골격불소증 사례가 관찰된다.
  • 호주에서 불소노출 수준과 치아불소증과의 관계를 측정해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
  • 일부 영아들과 아이들은 불소를 과다섭취하고 있다.
  • 불소화의 혜택을 확인하기 위한 초기의 실험들은 '일반적으로 빈약한 것이었다......'

  우리가 제출한 글에서도, NH&MRC 보고서에서도 다루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미국과 영국에서 중년 이상 여성들의 둔부골절(흔히 치명적인)이 비불소화 지역보다 불소화 지역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는 최근의 연구들이다. 그 증거의 대부분은 NH&MRC 조사 기간 중에 출판되었다.(55)

  비록 NH&MRC 보고서는 "조사위원회는 속임수나 데이터가 왜곡이용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우리들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그 증거들을 출판했다.(56) NH&MRC 조사 후 고참 불소화 제창자 그레이엄 크레이그 박사가 갑자기 시드니대학과 전장(戰場)을 떠났고, 이어서 1985년 NH&MRC의 왜곡된 보고서 작성에 책임이 있는 실무진 중 여러 위원이 현장에서 물러났다.

  새 조사위원회의 의장이 된 역학(疫學)자 토니 맥마이클 교수와 조사위원 중의 일원인 치과의사이자 통계학자인 A. J. 스펜서 교수가 이제 불소화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들이 옛 지도자들보다는 더 세련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몇몇 전술은 여전히 찬양할 만한 것이 못된다. 예를 들어, 《호주공중보건저널》에 논설 형식으로 NH&MRC(1991) 보고서에 대한 찬사의 논평을 썼던 맥마이클은 자신이 조사단의 대표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리뷰'는 코훈과 나의 연구 내용을 왜곡하고, 심지어는 자기자신이 쓴 보고서의 일부 결론까지 '왜곡'하여 보고서가 실제보다 더 불소화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호주공중보건저널》이 우리의 반론을 실어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57)

  1990년 초 NH&MRC 조사위원회에 제출한 나의 글들은 최신 자료로 보강, 개정되어, 불소화의 혜택과 건강상의 위험에 관한 두개의 주요 리뷰 논문으로 발표되었다.(58) 이들 논문의 주요 논점들은, 불소화의 윤리적· 정치적 문제와 함께 부록에 열거되어 있다.

  이 논문들이 출판된 직후 나는 AIH에서 사직하고 호주보존재단(Australian Conservation Foundation)의 지구변화프로그램 책임자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온실가스 방출을 줄이고 오존층을 복원하자는 전국적 캠페인이다. 내가 해온 일 중 가장 흥미롭고 벅찬 이 일은 내게 불소화 문제에 바칠 시간을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휴가 중에 나는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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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돗물불소화 반대 국민연대 사무국  office@no-fluorid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