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화면으로

 

  수돗물불소화 ― 나도 반대다  [칼럼]

  강수돌

 

 

 

 

 

 

 

 

 

 

 

  강수돌 - 노기연 소장, 고려대 교수
출처 - 환경정의 '생각 속으로', 2005/10/04


나도 속았다!

나는 고백한다. 그동안 이 문제와 관련해 정말 무지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사실 김종철 선생이 수돗물불소화 법제화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을 때만 해도 나는 막연히 김종철 선생님에 동조하는 정도의 느낌만 갖고 있었다. 현재 나는 대학 선생으로서의 일 이외에 우리 마을 이장까지 하면서 온갖 주민들의 민원을 챙기기도 바쁘고 또 거대한 건설자본이 마을을 망가뜨리면서 1000세대 넘는 고층아파트 단지를 만들려는 음모에도 온몸으로 저항해야 하기에 시간적 여유나 마음의 여유가 없는 편이다. 그래서 수돗물불소화 문제에 대해 ‘정독’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무지했다.

그런데 이번 <녹색평론>(2005년 9-10월호)을 통해 김선생님의 글을 정독하고 또 크리스토퍼 브라이슨의 글을 찬찬히 읽고 나니, 한마디로 “그동안 너무 속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그동안 수십 년간 반공 교육을 통해 “북한 사람들은 머리에 뿔이 달렸다.”고 배워왔다가 마침내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확인하게 되면서 “북한 사람이나 남한 사람이나 똑 같이 생겼네.”라고 말하며 “그동안 서로를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라고 한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러한 거대 속임수들은 솔직히 하나 둘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굴러가는 모든 영역에서 그러한 속임수들이 널려 있다. 예를 들면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신화, 일류 대학에 진학하고 일류 직장에 취업하는 게 성공이라는 신화, 저축 많이 하고 수출 많이 하면 경제가 발전해서 모두가 잘 살 수 있다는 신화, 나라가 부강해지면 개인도 행복해진다는 신화 등등이 모두 속임수다. 수돗물불소화가 치아 건강에, 특히 서민들의 치아 건강에 유익하다는 것도 예외가 아님을 이번에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이 문제에 혼신을 다해 싸워 오신 모든 분들께 한편으로 감사하고 다른 편으로 죄송할 따름이다.

 

2. 불소가 가진 문제점

일단 내가 읽은 내용 중에서 불소가 가진 문제점은 이런 것들이다.

첫째, 불소는 괴상한 힘을 가진 신경독극물이다. 불소는 일정량을 넘으면 뇌 및 중추신경계에 작용하여 정신착란, 피로, 졸음을 유발한다.

둘째, 불소를 함유한 상품들이 아이들의 IQ를 떨어뜨린다는 과학적 증거가 있다.

셋째, 불소가 충치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증거가 있지만, 그것은 국소적이고 상대적인 효과일 뿐, 이것이 물고 함께 몸속에 들어가면 몸속의 유익한 효소들까지 손상시킨다는 증거도 있다. 불소가 충치를 예방하는 정도의 사용량이 역설적이게도 독성물질로서의 불소의 최대 허용치와 비슷하다.

넷째, 불소가 치아에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는 긍정적 이미지는 50년 이상 미국의 자본과 군부, 학계가 의도적으로 조작한 결과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군산학 복합체가 불소의 본질을 교묘하게 세탁시킨 한 결과물이다.

다섯째, 논란이 되는 불소의 대부분은 인산비료 공장에서 나오는 불화규산이라는, 비소, 카드뮴, 방사능물질 등을 포함한 유독성 산업폐기물이다.

여섯째, 불소는 핵무기 제조를 위한 우라늄 강화에 쓰이고 사린 신경가스 제조에 쓰인다. 한마디로 군수산업에게는 필수 원료다.

일곱째, 불소는 치약 외에도 고품질 가솔린, 카펫, 방수복, 식각 유리, 벽돌과 세라믹, 약품, 살충제, 쥐약, 햄버거 포장지, 컴퓨터 회로판 등에 널리 사용된다. 또한 불소화합물이 작업장에 많이 사용되므로 공장 노동자들은 상습적으로 불소에 노출되어 있다. 세계 제2차 대전 동안 미국에서 원자탄이 제조될 때, 그 근처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불소에 중독되어 일찍 죽기도 했다.

여덟째, 불소는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가장 치명적 오염 물질인데, 20종의 다른 대기오염물질 전체를 합한 것보다 더 큰 손상을 끼친다.

아홉째, 불소가 알루미늄과 결합하면 유독성 환경호르몬이 되어 신체와 정신 건강에 해를 끼칠 수 있다.

열째, 불소는 분자 크기가 워낙 작아서 가정용 정수기로는 걸러지지 않는다.

 

3. 수돗물불소화가 가진 문제점

또한 내가 읽은 내용 중 수돗물불소화가 가진 문제점들은 이렇게 요약된다.

첫째, 수돗물불소화는 불소 사용을 일상화함으로써 과다복용의 문제를 안고 있다.

둘째, 수돗물불소화는 불소 사용을 무차별화함으로써 특히 어린이, 노약자, 임산부 등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셋째, 수돗물불소화를 사실상 강제하는 법을 입안하는 경우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전체주의를 확장하는 결과를 낳는다.

넷째, 수돗물불소화를 실시하는 나라는 미국과 영국 일부, 아일랜드, 홍콩, 싱가포르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외는 아예 실시하지 않았거나 도중에 극심한 반대로 중단하고 말았다.

다섯째, 수돗물불소화의 충치 예방 효과는 선전처럼 65% 감소가 아니라 15% 정도에 불과해 지극히 부분적임을 알 수 있다.

여섯째, 수돗물불소화로 인해 중추신경계 장애나 관절염, 골암, 갑상선 장애, 위장 장애, 앨러지, 반점치, 무력증, 다운증, 송과선 장애에 따른 멜라토닌 분비 등이 생길 수 있다.

일곱째, 수돗물불소화는 양심적 과학자들의 증언이나 연구결과를 무시하거나 억압하지 않으면 실시하기 어려운 시도이다.

여덟째, 수돗물불소화를 시행하려면 주민들의 의견이나 평소 주민들의 불소 섭취량을 세밀히 조사하는 것이 좋다. 한국인의 경우 화학 농법에 의한 농산물을 통해 이미 과다 섭취 중이며, 수출지향적 산업화로 인해 공기 속에도 불소가 엄청나고, 각종 해산물, 쌀, 보리, 콩, 녹차 등 원래 불소가 많이 든 식품을 일상적으로 먹고 있어 이미 적정량을 초과할 가능성이 높다.

아홉째, 수돗물불소화로 인해 가정에서 나가는 생활하수 속에 불소가 섞여 나감으로써 개울과 샛강, 하천의 생태계 교란이 예상된다.

열째, 수돗물불소화는 효과가 거의 없고 불필요하며 혈세를 극단적으로 낭비하는 대가로 해당 사업자들의 배만 불려주게 된다.

 

4. 수돗물불소화 논란에 나타난 문제점

수돗물불소화 논란은 그 원조국인 미국에서부터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모두는, 또 세계 민중 대부분은 불소 그 자체에 대해서나 수돗물불소화에 대해 별 다른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첫째, 정부 차원에서 불소가 가진 긍정적 효익만 일방적으로 강조했지 그 부정적 해악에 대해서는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기득권 세력이 이미지 ‘조작’에 성공한 것이다. 김종철 선생의 글에 따르면, 최근에 하버드대의 치과 교수가 불소화와 골암 사이에 명백한 연관성이 있음을 증명한 제자의 박사 논문을 은폐, 왜곡하여 보건당국에 보고한 것이 폭로되기도 했다. 정부나 자본, 또 그들의 지원을 받는 학자들과 실무자들은 수돗물불소화에 대해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중보건 사업의 일환이라고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그 사업으로 인해 이득을 얻는 자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실험용으로 또는 인질로 활용하는 것이란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둘째, 불소를 매개로 이득을 챙기려는 군부, 자본이 학계를 ‘지배’함으로써 객관적이고 공정한 연구를 가로막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입장만 대변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1940~50년대에 미국 신시내티 대학의 로버트 케호 박사는 산업적 불소와 식수불소화의 안정성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고 선전을 했는데 그의 연구비는 주로 인산비료 제조업자들과 같은 영향력 있는 기업집단들에게서 나왔다. <불소-거대한 속임수>의 저자인 크리스토퍼 브라이슨에 따르면, 미국 보스턴의 유명한 포사이스 치과센터의 소장인 존 헤인이 수돗물불소화에 지지 입장을 드러내자 콜게이트, 국립보건원, 유니레버와 같은 회사들에게서 포사이스 센터로 새로운 연구설비와 현금이 물밀듯이 흘러들어 갔다. 반면 진실을 말한 필리스 멀레니스는 억압받았다.

셋째, 불소의 해악에 대해서 잘 아는 과학자들조차 일자리와 소득, 각종 지원금과 명예 등을 잃을까봐 두려워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했다. 크리스토퍼 브라이슨에 따르면,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4월에 헤롤드 호지 박사가 불소가 사람의 중추신경계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의심을 품었음에도 반세기가 지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반 사회에는 물론 애제자 필리스 멀레닉스 박사에게조차 한 마디도 않았다. 국가와 자본의 지원을 받는 워싱턴 D.C.의 국립보건원은 멀레닉스가 불소의 중추신경계에 대한 영향력 연구를 지원해달라고 신청서를 내자, 한마디로 “불소와 중추신경계는 아무 연관이 없으니 연구할 필요 없다.”고 잘라 말하며 신청서를 거절하고 말았다. 불소와 중추신경계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돈 안 되는’, 사람에게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금이 나간 적은 없었다.

넷째, 불소의 해악에 대해 객관적이고 통찰력 있는 연구를 발표하게 되는 경우 주류 학계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거나 불신을 당하기 일쑤다. 기존의 보수적 연구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상실할까봐 두려워하는 데서 나온 병든 행위의 부산물이다. 실제로 필리스 멀레닉스가 약 30년에 걸쳐 무수한 지원을 받으며 ‘패턴 인식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하고 나서 500마리 이상의 생쥐 실험을 통해 불소가 신경중추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결과를 진실 되게 발표하자, 일단 “청중은 조용해졌고” 나중엔 “험악한 반응”을 보였으며 결국 다음해에 소장은 은퇴를 했고 자신과 동료들은 그 실험 결과를 <신경독성학 및 기형학>이란 과학저널에 발표한 뒤 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다섯째, 불소의 위험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정부나 자본이 일방적으로 홍보하는 내용들에 대해 너무나 쉽게 신뢰하고 나아가 그 논리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내면화’한다. 그것이 공고화되면 쉽게 바뀔 수 없다. 대개는 본인이나 가족 등 주위의 가까운 사람이 치명적 피해를 입을 때 비로소 인식이 바뀐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미 ‘버스는 지나가’버렸다. 캐나다의 라임벡 박사조차 “나는 나 자신이 실제로 한 번도 조사하지 않은 채 공중보건 분야의 치과의사들과 의사들, 미공중보건국, 미국 질변통제센터, 미국치과의사협회, 캐나다치과의사협회의 말을 믿고, 불소는 안전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로 보통 사람들은 압도적 권위 앞에 쉽게 복종하고 만다. 그러나 그 압도적 권위조차 자본과 권력이 그들에 유리하게 만들어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쉽게 내면화한 모든 신화와 이론에 대해 철저한 의문점을 가지고 이야기하기 시작해야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

 

5. 논란의 과정에서 느끼는 것들

자본과 권력 등 보수적 기득권 세력들은 풀뿌리 민중들의 온갖 문제제기에 대해 대개 ‘3D 전략’으로 일관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Deny, Delay, Dominate다. 예컨대 수돗물불소화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면 저들은 그 문제 자체를 부정(deny)한다. 한마디로 “낡고 왜곡된 데이터”를 갖고 까불지 말라는 식이다. 다음으로 저들은 문제 상황 자체를 지연(delay)시킨다. 즉 문제가 있음이 갈수록 드러나게 되면 일단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아직 시기상조다.”라는 식으로 문제 상황을 지연시킨다. 그러나 언제가 “시기적절”일지에 대해서는 그들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세월이 흘러도 그들은 앵무새처럼 “시기상조”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마지막으로 저들은 더 이상 문제를 회피하거나 지연하기 어려운 경우 문제 상황 자체를 지배(dominate)하려 든다. 즉 저들은 언론과 여론을 조작하거나 자신에 유! 리하게 만들기 위해 평소에 자기편으로 포섭을 해 놓은 자들을 불러 모아 공청회나 토론회를 열고 마치 공개적인 논의를 충분히 거친 것처럼 포장한 다음 결론적으로 자신들이 옳은데 “문제는 어떤 식으로 가느냐 하는 방법론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든지 아니면 “문제는 정도의 차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면서 사실상 문제 상황을 자기들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려 든다.

이러한 지배(domination)를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저들은 또다시 ‘3C 전술’을 동원한다. 그것은 Corruption, Cooptation, Cooperation 등이다. 우선 돈에 쉽게 넘어갈 사람들을 조용히 만나서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거액을 줄 터이니 좀 조용해 해 달라, 제발 우리를 좀 살려 달라, 지금 문제가 커지면 한국 경제가 망한다, 등등 온갖 (비)논리를 들이대며 결국은 ‘돈 먹고 입을 다물어라.’며 부패(corruption)의 덫으로 몰고 간다. 다음으로 돈 먹기를 꺼려하거나 부담스러워 하는 자들에게는 ‘자리’를 준다. 소위 감투 씌우기(cooptation) 전술이다. 현금은 부정부패임이 드러나지만, 일자리는 남이 보기에도 그럴 듯하고 지속적이다. 게다가 귀한 감투를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쓸 수가 있나, 하는 생각에 사람들이 수용하기도 쉽다. 다음으로, 가장 약한 듯 하면서도 가장 교묘한 전술은 협력자 내지 동반자로서 서로 협조(co! operation)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같이 호흡하며 동지처럼 하다가 일단 저들의 목적이 달성되면 토사구팽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대부분 상대적 약자들은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믿고 함께 하다가 배신을 당하고 만다. 하지만 이미 저들은 목적을 달성한 뒤다. 나는 수돗물불소화 사업과 관련해서 제발 이런 일들이 하나도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미 그런 덫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과감히 ‘양심선언’을 하고 양심 세력과 연대하면서 스스로 해방되기를 바란다.

한편, 나는 왜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데도 저들은 수돗물불소화 사업을 강행하려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본다. 물론 저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저들이 어딘가에서 커다란 물질적 이익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더 우려하는 것은, 정부나 업계가 자꾸만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고 강행하려 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제 발전이나 경영 사업들이 돈벌이에 한계를 노정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 영역을 확장해야 할 객관적 필요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 이래로 오늘날 정보화로 무장한 지구적 자본주의는 갈수록 이윤율 저하 경향에 시달림을 받는다. 새로운 투자를 하자마자 경쟁업체들이 따라잡기 투자를 하는 바람에, 또 더욱 첨단의 투자가 들어오는 바람에 그 새로운 투자로 인해 별로 돈을 벌지 못한다. 한마디로, 본전 뽑기조차 ! 어려운 판국이다. 그러니 물과 공기도 상품화해야 하고, 또 상품화된 수돗물조차 다시금 불소를 뿌린 다음에 갈수록 단가를 높여야 전 국민을 상대로 하는 돈벌이가 될 것이다. 그 결과는 한마디로, 삶의 토대의 전반적 파괴다. 자연과 정신이 모두 썩고 병들고 있다.

이러한 무의미하고도 파괴적인 일련의 새 사업 창출 노력들이 갖는 또 다른 의미 중 하나는, 이제 우리가 더 이상 식의주(생계) 해결이라는 것을 위해 추가적인 노력이 없이도 기존의 불평등만 해소하면 충분함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필요’에 바탕한 경제라면 그만 해도 될 일을, ‘이윤’에 바탕한 경제에서는 부단히 새로운 사업 영역을 ‘창조’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것을 저들은 ‘혁신’이라 부른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진정한 혁신과 창조를 하고자 한다면, 한편으로 불평등을 해소하면서 골고루 생계 해결이 되도록 하고, 다른 편으로는 ‘삶의 질’ 차원에서 사회경제 구조를 일관성 있게 근본 재구성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질이란, 건강과 여유, 인격과 평등, 공동체와 평화, 생태계의 온전함 등을 말한다. 그것이 보편적인 삶의 질 달성, 보편적 행복의 달성이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모든 노력! 의 방향성을 ‘고루 검소한 사회’로 잡아야 할 것 같다.

나는 또한 이번 논란을 보면서 과연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자본과 권력은 저들의 기득권을 위해 불소가 가진 추한 면을 가리고 그럴듯한 면을 과대포장해서 상품화한다. 반면에 우리는 불소가 든 치약으로 이를 말끔히 닦고 깔끔하게 옷을 차려 입은 뒤 그럴듯한 모임에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지만, 혹시라도 파리나 모기가 우리 주위를 맴돌 때 “이 더러운 것이!” 또는 “이 나쁜 놈이!”라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때려잡기를 마다 않는다. 파리나 모기를 추한 것이라고 미리 규정한 편견과 선입견에 따라 아무 거리낌 없이 행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라는 책에 따르면 파리나 모기, 바퀴벌레, 사마귀 등에 대한 우리의 반응 행위는 “우리가 내면에 가진 추한 면을 억지로 감추고 억압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감추고 싶은 면을 우리 외부의 존재! 에 대해 일방적으로 투사한 결과”다. 그리고 이것이 맞다면, 꼭 같은 논리로 우리는 우리의 그럴듯한 면을 우리 자신에게 가급적 많이 덧칠하고 싶어 한다. 바로 이런 덧칠 심리를 불소치약과 불소수돗물이 노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 즉, 불소치약과 불소 수돗물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하얀 이를 생각하게 만들고, 이것은 즉각적으로 멋진 사람, 아름다운 사람을 연상하게 만드니, 결론은 수돗물불소화에 두말 말고 찬성하라는 것이다. 안 그러면서도 진짜 그런 척하는 것, 일종의 위선이요, 상징 조작이다. 나는 이런 식의 상징 조작이야말로 위선적이고 탐욕스런 사람들이 가진 추한 면 중의 하나라고 본다. 하얀 이가 좋은 것이고 누런 이는 나쁜 것이라는 것조차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닐까? 브라이슨도 말하듯이 알곡과 채소 위주로 살던 시절에는 이를 닦을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무탄트 메시지>에 나오는 참사람 부족들에게서나 우리의 시골 어르신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산업사회, 정보사회가 되면서 정제된 탄수화물과 설탕 위주의 식생활로 인해 불소 넣은 치약으로 이를 닦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유독성 불소치약을 ! 쓸 게 아니라 양치질 자체가 필요 없는 식생활을 하면 되지 않을까? 그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또 우리가 불소치약을 치아의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수용하고 있지만, 수돗물불소화 논란과 관련, ‘도대체 건강이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나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아무런 장애가 없이 튼튼한 사람을 건강하다고 정의하지 않는다. 정말 건강한 사람은 삶의 태도와 정신, 그리고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물론 육체도 정신도 건강한 것이 좋다. 그런데 우리 현실을 보면 육체는 멀쩡한데 대부분 정신이 병들어 있다. 어떤 이는 일류주의 강박증에 시달리고 어떤 이는 조급증에 시달리며 어떤 이는 편집증에 시달린다. 어떤 이는 패배의식이 강하고 어떤 이는 열등감에 시달린다. 또 어떤 이는 우월의식이나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있고 어떤 이는 비관주의, 염세주의에 빠져 있다. 어떤 이는 부단히 다른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며 살고 있고 어떤 이는 수시로 상처를 입으며 살고 있다.

비록 축구팀이 월드컵 4강에 오르로, 올림픽 등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일등 선수들이 많이 나오더라도, 이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못한 사회다. 병든 사회에서는 병든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병든 사람들이 많으면 병든 사회를 고치기가 무척 힘겨워진다. 나는 수돗물불소화 논란이 어느 정도 이성적 논란 끝에 건강한 결론을 맺지 못하고 ‘억지 논리와 공권력으로 밀어붙이기’를 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병든 사회임을 다시금 확인한다. 그것도 중병이 든 사회다. 이런 사회 속에서 건강한 사람이 나오길 기대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물론 가끔은 바늘구멍을 엄청 넓히면서까지 통과하는 낙타들이 나오긴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건강을 생각한다면, 나나 가족의 육체적 건강만 챙기지 말고 정신적 건강까지 한번 챙겨 보자. 또한 개인 건강도 좋지만 사회 건강도 나날이 챙기자. 그래야 사회와 개인이 모두 건강해진다.

수돗물불소화와 관련해서 또 하나 드는 생각은, 한번 국가적으로 용인하거나 강제하기 시작한 것은 몇 가지 조작들과 홍보, 선전을 통해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일단 전국적으로 체계적 가동이 시작되면 그에 대해 저항하거나 진로를 변경하기란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중적으로 보편화된 수돗물을 정책적으로 불소화한다면 만일 특정 개인이나 지역 사회에서 이를 거부하기란 무척 어렵다. 나중에는 억지로 마셔야 한다. 이것은 ‘고문 아닌 고문’이다. 생각해 보라. 한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그 동네는 영원히 아파트 단지다. 아파트 단지를 허물고 새롭게 전원 마을을 만든 사례를 본 적이 없다. 역으로 일반 주거 단지를 허물고 재개발한답시고 들어서는 대부분의 건물은 거의 아파트 단지다. 그 과정에 부정부패, 폭력, 허위, 억지, 기만, 협박이 난무한다. 일단 그 단지가 들어서면 그 주변은 아파트 단지에 걸맞게 변모한다. 나중에는 그 주변이 갈수록 아파트 단지에 포섭되고 재개발의 영역은 확장되기만 한다. 일종의 ‘아파트 제국주의’다. 나는 수돗물불소화 정책도 마찬가지라 본다. 한 군데서 제도적으로 강제되면 갈수록 확장되어 마침내 전체를 장악한다. 불소화된 수돗물이 생활과정에서 사람들이 가지는 선택권, 즉 일종의 민주적 힘을 일방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방식으로 무력화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회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수돗물불소화를 추진하는 사람들의 논리, 즉 “균형 잡힌 식사를 못하거나 치과에 못 가고 불소치약으로 규칙적으로 이를 못 닦는 가난한 가정들을 위한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충치예방법”이란 그럴듯한 논리가 가진 허점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다수’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조치라는 것인데, ‘다수라는 관념’이 은연중에 우리를 제압하는, 일종의 ‘독재적 공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 ‘다수’조차도 체계적인 홍보 및 교육, 선전과 세뇌를 통해 만들어진 것임을 감안한다면, ‘다수의 논리’를 강조하는 것은 자칫 다수를 빙자하여 기득권을 수호하고 확장하려는 자들의 논리적 본질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 할지라도 풀뿌리 민중이 솔직하게 선택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책임성’을 갖고 잘못된 경우 주체적으로 진로 변경을 할 수 있다. 만약 일부 엘리트들이 '몽매한’ 민중을 계몽하고 지도하는 방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엘리트의 지배력은 얼굴만 바꾸어가며 영속화하되, 그 민중은 영원히 우민으로 남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제도나 정책과 관련해서 ‘다수’라고 해서 무조건 옳거나 바람직하다고 쉽게 판단하지 말고 ‘어떤 내용을 가진 다수인지’ 면밀히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우리가 이렇게 많은 문제점을 지적하고 정부와 기업과 사회 전체가 생각과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함에도, 왜 그토록 현실 변화는 지지부진한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사실 수돗물불소화 문제 뿐 아니라 환경호르몬, 온갖 모양의 개발과 건설 프로젝트, 노동억압적 현실, 살인적 교육 체제, 삭막하고 비관적인 경제 체제, 온갖 형태의 차별과 불평등 등 모든 문제에서 우리는 나름의 문제의식과 나름의 해결책들을 내놓고 있다. 물론 그 중에는 ‘삶의 위기’를 타파하기는 커녕 교묘하게 악화하는 것들도 많다. 동시에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대안들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도 나온다. 그런데도 왜 현실은 갈수록 암담하고 별 다른 전망이 보이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가 ‘정보 부족’이라기보다는 ‘간편주의’와 ‘소비주의’에 ‘중독’이 된 나머지 살아있는 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만약 기득권 세력이 우리에게 불소치약을 일일이 구매해 뚜껑을 열고 짜서 쓰기보다는 수도꼭지 한번만 틀어 이를 닦기만 해도 그냥 간단하고 편리하게 충치 예방이 된다고 하면 대부분은 속아 넘어가지 않을까?

한편, 환경적 측면이나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불화규소나 불화나트륨이라는 산업폐기물을 ‘재활용’한다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그것이 재활용되어 수돗물에 들어가게 될 때 사람과 자연 모두에게 미칠 악영향은 대단히 우려스럽다. 나아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선택 여지를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게 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에 위배된다.

독재다. 물을 통한 독재. 결국, 산업폐기물의 재활용도 좋겠지만, 그 이전에 산업폐기물이 원천적으로 생기지 않도록 생산과정이나 생산물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자연에서 나와서 자연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은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우리가 쓰는 물품들의 수를 갈수록 줄여나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간편주의와 소비주의에의 중독은 우리가 갈수록 ‘쓸 데 없는 것들’에 집착하게 하고 낭비하게 만든다. 그리고 쓸 데 없는 것들을 만드느라 일중독에 빠지고 그런 식으로 본연의 욕구 충족(높은 삶의 질을 누리며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미루다보면 갈수록 간편주의나 소비주의에 중독된다. 마침내 일중독과 소비중독의 쳇바퀴 속에 맴돌다 의미 없이 한 평생 다 보내고 간다. 이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이다. 겉보기에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좀비 같은 신세.

나는 크리스토퍼 브라이슨이 그 서문의 마지막에 쓴 말, “좋은 과학은 변화를 위한 예리한 도구를 제공해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얽어매온 족쇄로부터의 해방은 여론과 시민적 행동에 의해서 가능할 것이다.”라는 말이 참 옳다고 본다. 우리가 공부를 하고 이론들과 씨름하는 것은 변화를 위한 올바른 도구를 찾는 과정이다. 그러나 실제의 인간 해방, 노동 해방, 생명 해방의 과정은 그 어떤 이론으로도 포착할 수 없다. 그것은 곧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장 오늘부터라도 우리가 평소에 불소를 얼마나 섭취하고 있는지 조심스럽게 점검해볼 일이다. 나아가 수돗물불소화를 강제하는 법이 절대로 통과되지 못하도록 흩어져 있는 힘들을 모아 나가야 한다. 흩어진 꿈은 꿈으로 남지만, 연대하는 꿈은 현실이 된다. 특히 저들의 눈에 ‘불가능한 것들’을 끊임없이 요구하자! 이제는 더 이상 속을 수 없다!

 

 

 

수돗물불소화 반대 국민연대 사무국